although / though / even though / in spite of / despite

A. Study this example situation
Last year jack and Jill spent their holiday by the sea.
It rained a lot but they enjoyed themselves. You can say :
Although it rained a lot, they enjoyed themselves. ( = it rained a lot but they... )
or In spite of the rain, they enjoyed themselves.
Despite the rain, they enjoyed themselves.

B. After although we use a suject + verb
- Although it rained a lot, we enjoyed our holiday.
- I didn't get the job although I had all the necessary qualifications.

Compare the meaning of although and because :
- We went out although it was raining.
- We didn't go out because it was raining.

C. After in spite of of despite, we use a noun, a pronoun (this/that/what etc.) or ~ing
- In spite of the rain, we enjoyed our holiday.
- I didn't get the job in spite of having all the necessary qualifications.
- She wasn't well, but in spite of this she went o work.
- In spite of what I said yesterday, I still love you.

Despite is the same as in spite of. Note that we say 'in spite of', but despite(without 'of')
- She wasn't well, but despite this she went to work. (not 'despite of this')
You can say 'in spite of the fact (that)... ' and 'despite the fact (that) ...'
- I didn't get the job in spite of the fact (that) I had all the necessary qualifications.
- I didn't get the job despite of the fact (that) I had all the necessary qualifications.

Compare in spite of and because of :
- We went out in spite of the rain. (or .... despite the rain)
- We didn't go out because of the rain.

D. Compare although and in spite of/despite :
- Although the traffic was bad, I arrived on time. (not 'in spite of the traffic was bad')
- In spie of the traffic, I arrived on time, (not 'in spite of the traffic was bad')
- I couldn't sleep although I was very tired. (not 'despited I was tired')
- I couldn't sleep despite being very tired. (not 'despited I was tired')

E. Sometimes we use though instead of although :
- I didn't get the job though I had all the necessary qualifications.

In spoken English we often use though at the end of a sentence:
- The house isn't very nice. I like the garden though. (= but I like the garden)
- I see him every day. I've never spoken to him though. (= but I've never spoken to him)

Even though (but not 'even' alone) is a stronger form of although :
- Even though I was really tired, I couldn't sleep. (not 'Even I was really tired ...')
Posted by 두장
2009. 1. 10. 06:49

 

With any luck by next year 
I'll be going out with one of these girls. 
내년에 행운이 따른다면 
난 이 여자들 중 한명과 데이트할꺼야 

But for now, let me say 
Without hope or agenda 
Just because it's Christmas 
(And at Christmas you tell the truth) 
하지만 지금은, 어떤 희망이나 조건없이 그냥 말할께. 
크리스마스니까(크리스마스에는 진실만을 말한다잖니) 

To me you are perfect 
And my wasted heart will love you 
Until you look like this 
내게는 넌 완벽해 
그리고 너한테는 이런 내 감정이 소용없겠지만 
난 앞으로도 널 사랑할꺼야 
너가 이렇게 될때까지 

Merry Christmas 
메리 크리스마스
Posted by 두장

37. 부탁하다 - ask / request / require / demand / claim

 

ask

부탁하거나 질문할 때 사용하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다.

 

request
request는 ask보다 격이 높은 표현이다. 단, ask와는 달리 yes/no로 답하는 질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내가 소속된 단체가 다른 단체와 협력을 하고 싶을 때에는 We request your cooperation in this project.(저희는 이번 기획에 귀 단체의 협력을 요청합니다.)처럼 request를 사용한다. 즉, 정식으로 허가를 구할 때 request를 쓰는 일이 많다. 기획안을 제출하여 정식으로 자금을 요청할 때도 마찬가지. 이를 a budget request(자금 제공 의뢰)라 한다.

 

require
require는 어떤 필요에 의해서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일을 [부탁하다/요구하다]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렌터카 회사에서는 고객의 운전 면허증 소지를 요구한다(The car rental company requires you to have a driver's license). 이때 요구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require는 사람을 주어로 하여 수동태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demand
demand는 require와 같은 뜻이기는 하지만 그 강도가 훨씬 강하다.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뉘앙스가 있으므로 demand를 사용하려면 그만큼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방금 사온 카메라에 결함이 있다면 구입한 가게에 가서 당당하게 교환을 요구한다(You will demand a replacement).

 

claim
claim은 특히 주의해서 써야 하는 단어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claim은 제동을 걸어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claim은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바를 주장하다]란 뜻이다. 예를 들어 아무 잘못도 없는 운전사가 사고에 휘말렸다면 기자는 He claims that the accident was not his fault.(그는 그 사건이 자기 과실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라고 보도할 것이다. 이외도 과학자가 자신의 학설을 주장할 때도 흔히 claim을 사용한다.

Posted by 두장

정읍 진산동 영모재 - 영모재는 정읍시 진산 마을 어귀 나지막한 산비탈에 위치한다. 1915년 조성된 솟을 대문 및 행랑채를 들어서면 넓은 뜰이 있으며 그 중심에 1885년에 지어진 정통한옥 건물인 영모재가 있다. 건물은 정남향을 하고 있다. 평면구조는 전면에 퇴간을 두고 좌측공간은 방의 용도로 구들이 깔려 있다. 우측공간은 대청으로 되어 있고 삼면의 문을 다 들어 올리면 정자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풍류형 누정 형태로 근대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모재는 본래 농산재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풍류방이었다고 전하며, 이 건물은 지은 김평창(본명 김상태)은 이곳에서 정읍권번을 통해 양성되던 명기들의 기예를 심사하거나 공연을 여는 등 정읍 풍류 문화를 이끌었다. 김평창의 사후 그를 추모하고 제살ㄹ 지내는 광산김씨 사당으로 변모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애사 - 유애사는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이순신은 조선 선조 22년(1589)에 정읍현감으로 부임해 1년 반 정도 근무하닥, 전라좌수사로 벼슬을 옮겨갔다. 유애사는 이 지역 선비들이 이순신의 덕을 추모하여 세운 것으로,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유애재민>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후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 지역 출신 의병 유희진과 유춘필의 위폐를 추가로 모시고 함께 제사지냈다. 이 유애사는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린 것을 근래 다시 복원했으며, 한때 <충렬사>라 부르던 이름도 <유애사>로 고쳤다. 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이순신 등의 숭고한 희정신의 참뜻을 되새기고 있다.

Posted by 두장
10월 11일 정읍을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읍에 있는 천원역이라는 간이역이다..
하루에 아침, 저녁으로 2대만 정차는 역이라서
어쩔수 없이 새벽에 일어나서 서대전역에서 천원역으로 가는 첫차(?)를 탔다.


천원역에서 내린후 방금 내렸던 기차를 찍었다..
천원역에 내리는 사람들 10명 정도로 생각외로 좀 많았다.


다행히 도착한 날 날씨가 엄청 맑고 구름도 이쁘고....


가을의 날씨를 잘 느낄수 있었던 그런 날이었다.


천원역사 밖으로 나오자 바로 앞에 조그만 식당같은것이 있었고
그 앞에 몇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아서 계셨다.


길가에 하얀 강아지들이 엄청 짖어돼서 무섭웠는데...
얘네들이 사진 찍으려니깐 갑자기 급 조용해졌다


길가에 콩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는 한 아저씨가 콩을 뽑고 있었다.


마을 한곳에 있던 옛날 한옥집이다.
살짝 보니 실제 사람이 사는 곳 같은데 무슨 건물인지 무슨 용도가 있는지 잘....흠...



가을의 느낄수 있는 단풍도 한컷...


날씨가 좋아서 인지 대부분의 아스팔트 길 옆에는 벼를 말리려고 잘 널어놓아져있었고


한 할아버지가 벼를 잘 피고 있었다...


날씨는 정말 화창하게 파랗고 맑은 날이었다..


마을에 조그만 냇가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 근처에 있던 갈대들....


지붕위에 자라고 있는 호박들...
호박을 많이 찍지는 않았지만 길가에 많은 호박들이 자라고 있었다
일부러 심은건지 아니면 우연히 자라는 건지 확실치 않았지만
호박들이 커져서 누런 늙은 호박된것들이 많았다..


홍시가 될려고 준비중인 감들..


천원역에서 근처의 호남 고속도로를 가로 질러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인상적이었다.


마을 어귀에 오래된 고목도 보이고...

추수가 끝난 논이다. 여기 보이는 사진의 오른쪽에서는 콤바인으로 열심히 추수하시는 분들이 있기도 했다.

정읍에 내장산이 단풍으로 유명해서 인지 
"단이와 풍이"가 마스코트 같은것이가 보다...
버스정류장에 얘네들이 그려져 있고 단풍모양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천원역에서 정읍 시내로 걸어오다
유애사, 정읍진산동영모재 라는 문화재가 있어서
무엇인지 궁금해서 찾아가 보았다..


정읍 시내로 가는 길 바로옆에는 KTX 철로가 있어서
철로에서 한컷....길게 쭉 뻗은 기찻길....


가을을 물씬 느끼게 해주는 코스모스들..
정말 많이 피어있었다..


천원역에서 출발한지 약 4시간 정도 걸어서
겨우 정읍역까지 도착했다...
정말 힘들게 ㅜㅜ
Posted by 두장

펜탁스의 역사 ( PENTAX, The History ! )


아래의 글은 예전에 유공게시판에 올라왔던 글을 재정리한 것입니다.



▣ 펜탁스, 일본을 카메라 왕국으로 인도한 1안 리플렉스의 선구자

일본의 1안 리플렉스 카메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아사히 펜탁스로 귀결된다. 
그것은 1안 리플렉스의 원점이며, 나아가서는 카메라 왕국 일본을 만들어낸 원천이라 말할 수 있다. 
1안 리플렉스를 창조해낸 아사히 광학(Asahi Optical Co.: 旭光學)은 1919년에 설립되어, 
1920년대에 투영기 렌즈를, 1931년에 카메라 렌즈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 중에 생산된 제품은 전부 군용이었다. 아사히의 명성을 알리게 된 것은 
1951년의 일본 최초의 SLR인 아사히플렉스(Asahiflex) 이었다. 아사히 광학(Asahi Optical Co.:旭光學)은 
그 후로도 끊임없는 개척정신을 발휘하여왔으며, 아사히플렉스라인은 여전히 펜탁스의 중심 카메라라인으로 남아있다. 


▣ 아사히플렉스의 탄생

일본 최초의 35mm 1안 리플(35mm 1안 반사식카메라), “아사히플렉스(Asahiflex) I” 이태어난 것은 1952년의 일이다. 
패전 후 혼란으로부터 일어선 기존의 카메라 메이커들에 의한 6X6판 스프링 카메라와, 2안 리플랙스, 35 미리판 렌즈셔터기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였다. 
라이카형의 고급기만이 거리계 연동식 렌즈교환형 카메라로는 유일하게 정전(停戰) 전(前)부터의 경험을 살려 조금씩 점유율을 늘려가고 있었다. 

안경메이커였던 아사히 광학은 전후(戰後) 렌즈 연마에서부터 조업을 개시, 쌍안경과 천체망원경으로 사업을 궤도에 올렸다. 
그 중에서도 타사는 손을 대지 않던 소형 쌍안경 쥬피터(Jupiter)는 월 생산량 500대였던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5,000대로 상승한 히트상품이 되었다. 
소형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렌즈코팅을 할 때 최신기술을 도입하는 등 고품질의 제품을 남보다 빨리 도입했던 것이다. 
이 평판은 카메라 메이커들도 듣고 수주를 늘리게 되었다. 

당시 아사히 광학의 경영은 1951년 사장으로 취임한 창업주의 조카 마쓰모토 사부로(松本三郞)가 맡고 있었다. 
마쓰모토(松本) 사장이야말로 "아사히 펜탁스"의 실질적 창업주라 할 수 있다. 
그는 예전부터 연마회사에서 탈피 독자적인 제품을 생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 쌍안경으로 아사히 광학의 이름을 알렸던 것이었다. 
그는 카메라를 몹시 좋아하여 독일제 6X6판 1안 리플 "리플렉스 코렐레(Reflex-Korelle)"를 애용하고, 그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때까지의 거리계연동식 카메라는 물론 2안 리플도 촬영 렌즈를 통해 상을 관찰하는 1안 리플식의 파인더에는 미치지 못했다. 
렌즈교환을 전제로 하면 거리계연동식에 비해 1안 리플카메라는 그야말로 "보이는 그대로가 찍히는 이상적인 카메라"였던 것이다. 
게다가 컬러 리버설 필름의 출현으로 슬라이드 감상이 화제가 되어 ‘시차’없는 정확한 촬영이 기대되던 시기였다.

카메라 크기를 기준으로 마쓰모토(松本) 사장의 핵심 컨셉(Key Concept)은 "쓰기 쉽고 간편한" 것이었다. 
당시 고급 카메라의 심볼이었던 라이카 C와 F를 참고로 카메라의 외형을 계산하라는 주문이 기술자에게 내려졌다. 
"소형, 경량"은 이후 아사히 광학의 철학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참고가 될만한 카메라는 가지고 있던 코렐레 밖에 없었다.

당시 1안 리플로서는 독일 이하게(Ihagee)社의 베스트판 엑잭타(Exata, 1933년), 35밀리판 키네 엑잭타(Kine-Exata,1936년)가 있었으며, 
50 포토키나(PHOTOKINA) 에서는 동독 짜이스 이콘(Zeiss Ikon A.G.)社의 35밀리 1안 리플, 콘탁스 S(1949년)가 출품 되었지만 어느 것이나 몸체가 컸다.

처음으로 제품을 생산할 때는 설계자만으로는 지극히 어려운데 그 이유는 최초 개발자는 회사 내부에 제조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본이 되는 포컬플레인셔터(Focal Plane Shutter)부터 시작하여 일본 내에서조차 아직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복원 반사거울(반전미러, Return Mirror)를 짜 넣은 미러 박스"까지...... 문자 그대로 영(零, 0)에서부터의 시작이었다. 
캐논이나 미놀타, 니콘의 경우와는 전혀 틀렸다. 아사히 광학은 명실상부한 1안 리플렉스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1호기‘아사히플렉스(Asahiflex) I’의 제원(諸元)을 살펴보면 셔터가 B, 1/20∼1/500초까지 가능하며, 
접는 방식의 핀트후드를 일으키면 초점조절스크린에 좌우 역으로 상이 비추어졌다. 
셔터 버튼을 눌러 내리는 힘으로 미러를 상승시키고, 셔터를 작동시킨 후 버튼을 떼면 미러가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파인더는 웨이스트레벨 뿐이었고, 렌즈마운트는 37mm 스크류마운트로 표준 42mm사이즈가 아니었다.

개발자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획기적인 신제품을 취급해줄 곳은 없었다. 
잘 팔리고 있는 2안 리플렉스 쪽이 튼튼하고 안전한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판매처는 핫토리(服部,복부)시계점이었다. 
테사(Tessar) 타입의 표준렌즈 Takuma 50mm F3.5를 포함한 판매가격은 2만 3000엔으로 책정되었다. 
당시 포컬플렌 식으로 렌즈교환이 가능한 일본 내 라이카형 카메라가 5만엔 전후, 아사히플렉스는 그 반값이었다. 
고급기라는 위치설정에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호평을 얻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용 후 많은 의견들이 보내져왔다. 
‘셔터 버튼이 무겁다’, ‘미러가 튀어 오르는 반동으로 손이 떨리기 쉽다’, ‘블랙 아웃을 없애주길 바란다’라는 등의 
의견들 이었으며, 개발 당사자들 역시 인정하는 부분들이었다.


▣ 실용화를 증진시킨 퀵리턴 미러(Quick Return Mirror)

2년후인 1954년에 발표된 아사히플렉스 IIb에서는 촬영 후에 미러가 자동적으로 복원되는 즉시 복원 반사거울
(퀵리턴 미러,Quick 또는 Instant return mirror)가 최초가 넣어졌다. 
퀵리턴 미러의 실용화 없이 1안 리플렉스의 발전은 있을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1안 리플의 최대의 결점이었던 파인더의 블랙아웃이 해결되어 기동성을 갖추게 됨으로써 
후에 라이카의 레인지파이더(Range Finder)식 카메라로부터 고급기의 왕좌를 뺏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2초까지의 저속(低速, slow)셔터를 부착한 아사히플렉스 IIa(1955년)은 58mm F2.4를 포함하여 3만9500엔에 판매되었으며, 
[눈동자로부터 달까지]란 캐치프레이즈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아직 광각렌즈는 없었지만, 
50mm F3.5, 85mm F1.9, 100mm F3.5, 135mm F3.5, 500mm F5 등 전용렌즈 6개와 접사용품으로서 자옥식 벨로즈(bellows) [베로스코프]와 
[접사링]현미경어댑터 전용복사대 그리고 플래쉬 건 등까지 준비되었다. 명실상부한 일본최초의 아사히 펜탁스(AP)는, 
아직 축대가 2개이면서 1초의 슬로우 셔터를 탑재, 필름감기는 레버식, 필름 되감기는 크랭크식을 채택함으로써 
사용법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파인더를 통해 피사체를 보면서, 연속해서 찍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렌즈 마운트도 변경되었다. 당초의 플렉스는 직경 37mm였으나 펜탁스는 직경42mm의 소위 프락티카 마운트
(Pentax/Practica Universal Screw Mount, M42 Screw Mount)로 직경을 넓힌 것이었다. 
변경할 때 바요넷(Bayonet)식도 검토되었으나, 국제적인 호환성을 감안하여, 당시 프락티카, 콘탁스에딕서 등이 채용하고 있던 
스크류 마운트(Screw Mount)로 결정했다고 한다. 1975년 바요넷(Bayonet)식의 K마운트로 완전히 바꾸게 되는데, 
그 중간에도 몇 번이나 바요넷 마운트로의 전환이 검토되었으며 후에 베스트셀러가 된 펜탁스SP는 발매에 앞서 60포토키나에 발표할 
당시에는 바요넷 마운트였다고 한다. 


▣ 아사히 펜탁스의 탄생 / 추격 따돌린 고급기 K형 

아사히펜탁스 1호기(아사히 펜탁스 (오리지날), 펜탁스 AP라고 불림)는 1957년에 탄생하였다. 
펜탁스는 아이레벨 파인더를 부착했으며, 표준42mm 스크류마운트를 가진 교환렌즈, 
급송레버(rapid wind lever)와 접는 되감기 크랭크를 가졌다. 이 모델은 초기의 아사히플렉스와는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이었다. 

아사히펜탁스 1호기가 탄생한 1957년에는 일본내 대기업 카메라 메이커들도 1안 리플렉스 시장참가를 시도하고 있었다. 
퀵리턴 미러가 개발된 1954년, 라이츠(Ernst Leitz)社가 비약적으로 뛰어난 거리계연동식 파인더를 탑재시킨 라이카 M3를 발매함으로써, 
라이카를 따라잡고 이를 뛰어넘은 듯이 보이던 캐논V나 니콘SP도 결정적이 답이 되지는 못했다. 
그 라이카 M3의 등장이, 일본 카메라산업을 1안 리플렉스로 몰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의 톱을 달리던 東京광학의 톱콘R(1957년). 이어서 즈노 광학의 즈노 카메라와 千代田광학의 미놀타SR-2(1958년), 
캐논 카메라의 캐논 플렉스와 일본광학(현재 니콘)의 니콘F, 보급기로는 쿠리바야시 사진기인 페트리페터, 중판의 젠저브로니카(1959년)등이 등장한다.

이렇게 뒤를 쫓는 신규 메이커들에 대항하기 위해 펜탁스는 고급화를 시도했다. 
펜탁스K(1958년)에서는 셔터 최고속도에 1000분의1초를 추가하여, 이제까지의 1/2, 1/4, 1/8, 1/15, 1/30 배수 계열을 개정했던 것이다. 
세계최초의 실험정신을 발휘하여, K형은 초점조절스크린(초점판 유리,Ground Glass)의 중앙에 마이크로 프리즘을 도입하여 초점 맞추기를 용이하게 했다.

또한 렌즈의 조리개 방식을 개정하여, 이제까지의 2중 조리개링에 의한 프리셋트 조리개에서 세미오토식의 자동조리개로 변경하였다. 
이것은, 조리개 링을 원하는 눈금까지 돌리면 레버로 개방 할 수가 있어, 셔터버튼을 반만 눌러도 조리개가 조여지는 기구인 것이다.

펜탁스 K는 오토 타쿠마(Takuma) 55mm F1.8을 포함하여 5만1500엔에 팔렸다. 
교환렌즈에는 리트로포커스(Retro-Focus)식의 광각 35mm F2.3에서 초망원렌즈 1000mm F**까지 모두 10개가 준비되었다.

1안 리플렉스는, 그 구조상 렌즈의 후면에서 필름까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광각 렌즈에 역망원 타입이라고도 불리우는 리트로포커스(retro-focus)식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이를 실현 시킨 것이다. 
오토 타쿠마 35mm F2.3은 당시로서는 매우 밝은 광각 렌즈였다. 또 1000mm렌즈는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활약하여, 
후에 TV선전 "망원이다, 망원이다, 1000mm야, 1000mm야"로 널리 알려 지게 된다.


▣ 가격인하(Cost Down) 

K라는 명칭은 1안 리플의 제왕, 킹이라 불리 우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다음해 1959년에는 55mm F2를 부착한 3만5천엔으로 크게 가격을 인하한 펜탁스 S2를 발표했다. 
S2의 최고속도은 500분의1초였으나, K형의 단순한 스펙다운이 아니었다. 
카메라 전면의 슬로셔터 다이얼을 중지하고 상부의 다이얼로 모은 소위 1축 무회전식으로 개정된 것이다. 

당시 아사히 펜탁스사는 대량생산시스템을 도입하여, 생산성과 품질관리의 향상을 꾀했다. 
파인더 접안부에 틈을 내어 정밀한 핀트조절이 가능하도록 매그니파이어와 로우앵글 촬영용의 레프컨버터(refconverter) 등
세세한 부분에도 심형을 기울였다. 보급기 가격의 고급 1안 리플로서 널리 애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카메라 입문자의 반은 이 S2로 사진을 시작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이다. S2는 1000분의1초를 부활시킨 S3(1961년), 
S3에 셀프타이머를 내장시킨 SV(1962년)로 발전해 간다. 그 동안에 렌즈는 차례로 완전자동 조리개식의 슈퍼타쿠마(Super Takuma)로 변환, 
현재의 1안 리플처럼 조리개가 항시 개방되어 있는 채로 파인더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처음으로 CDS를 이용한 착탈식의 연동노출계도 시스템에 첨가되었다. 
그때까지의 셀렌식과 비교해 볼 때 표준렌즈의 화각(찍을 수 있는 범위)에 가까운 40도라는 좁은 수광각 덕분에, 
정확한 노출을 측정할 수 있었다. 1962년 정도부터 컬러 네가 필름의 수요가 급격히 증대했다.


▣ TTL측광의 선견성

펜탁스 SP(펜탁스 SPOMATIC)의 전신인 펜탁스 스포트아이라는 시험작이 발표되었다. 
이미 렌즈셔터식의 보급기에는 노출계내장형이 출현해 있었지만, 1안 리플에 노출계를 내장시킨다는 - 
현재 모든 1안 리플에 도입되어있는 TTL방식- 발상은 당시 카메라계에 혁명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TTL식 연동 노출계 내장 1안 리플의 발표로, 펜탁스는 또 다시 세계최초라는 개척정신을 발휘했다. 
[뉴욕타임즈]는 "촬영렌즈를 통해 빛의 양을 측정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이후 카메라의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 낼 것이다."고 보도했다. 
현재, 뉴욕타임즈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포토키나에서 발표된 스포트아이는, 1963년의 카메라쇼에 스포트매틱(SPOMATIC)이라는 이름으로 출품되었다. 
원형이 스팟 노출계(spot meter)를 가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표준렌즈는 Super Takuma 50mm f1.4.

초점조절스크린의 중앙하부, 마이크로 프리즘 바로 아래에 CDS소자를 채워넣은 것으로, 
화면의 일부를 측광하는 스팟(Spot) 측광방식이었다. 파인더 화면에 항상, 직경 3mm의 검은 점과 리드선이 보였다. 
발표 후 곧바로 발매할 생각으로, 이미 양산 시험, 수십대가 모니터로서 프로사진가들 손에 넘겨져 있었다.

프로의 의견은 찬반양론이었다. [메이커로서는 훌륭하다. 하지만, 먼지처럼 보이는 검은 점은 용납할 수 없다.] 
그 비판을 무시할 수 없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급히 변경되었다. 
파인더 접안부의 양옆에 CDS를 배치하고, 펜타프리즘을 통해 들어온 초점조절스크린의 평균적인 밝기를 측광하는 평균측광방식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측광시에는 렌즈의 조리개를 촬영시의 치수까지 조여서 측광하는 스톱다운(stop-down)방식을 채용하였다. 
심플한 구조로 비용 측면에서도 유리했기 때문에, 이후 많은 메이커들이 이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카메라 쇼 후에, 바로 발매된 탑콘 RE슈퍼는, 1안 리플의 미러위에 작은 틈을 내어 미러 뒷면에 붙인 CDS로 수광시킨다는 미러메터 방식이었다.

1년후, 카메라에 새겨진 스포매틱 문자는 그대로 펜탁스 SP의 명칭으로 발매되었다. 
"TTL 조리개 평균측광 정합점 일치식 연동노출계 내장"의 1안 리플의 탄생이었다.


▣ 렌즈의 고성능화와 SMC

1971년에 발표된 세계 최초 조리개 우선 AE 시스템을 갖춘 Asahi Pentax ES에는 또 한가지의 화제거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표준렌즈로 SMC Takumar 50mm f1.4를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세계 최초로 1안 리플용 렌즈에 SMC(Super Multi Coating, 다층반사방지막)을 시행한 것이다. 
렌즈의 표면에서 반사된 일부 광선이 유해한 광선이 되어 렌즈의 광학성능을 떨어뜨리게 된다. 
구성매수가 많은 대구경 렌즈나 줌렌즈를 고성능화 시키기 위해서는, 렌즈의 투과성능 향상이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렌즈의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단층 코팅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며, 우주공학 분야에서나 이용되던 멀티코팅을 
일반 대중용에 투입한다는 것은 당시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사(펜탁스사)는 교환렌즈용의 무척 콤팩트한 설비를 도입하여, 전제품을 SMC화 했던 것이다. 
마침, 컴퓨터 도입으로 렌즈 설계기술이 비약적으로 향상, 발전될 가능성이 보이던 시기였다. 
고성능의 렌즈가 차례 차례로 설계되었지만, 플레어나 고스트에 의해 설계대로의 성능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었으며, 
이 기술도 현재는 각 카메라 메이커가 도입하고 있는 선견성있는 기술이었다.


▣ K 마운트로의 변경 / 펜탁스의 시련 

퀵리턴 미러, TTL측광, 조리개 우선AE의 개발과, 1안 리플의 분야에서 끊임없이 선구자의 길을 걸어온 펜탁스에도 커다란 시련이 닥쳐왔다. 
렌즈교환이 귀찮은 스크류마운트와 결별하고, 처음으로 바요넷식의 K마운트를 채용한 카메라가 펜탁스 K2, KX, KM의 세 기종이었다. 
이것이 1975년의 일이다. K2와 KX에는 응답속도가 빠른 수광소자 SPD(실리콘포토 다이오드)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이런 "세계최초"도 이번에는 빛을 받지 못했다. 

1972년, 올림퍼스 광학이 크기와 무게를 강조하며 야심차게 발표한 OM시스템의 올림퍼스 OM-1, OM-2의 크기와 무게를 더 하면 신선미가 느껴지질 않았고, 
다음해인 1976년에 캐논이 대량생산 시스템을 도입하여 5년만에 생산한 캐논AE-1에는 가격 면에서 대항할 수 없었다. 
특히 캐논 AE-1의 출현은 "AE-1쇼크"로써 카메라 개발사에 새겨지게 되었다. 
펜탁스 뿐만이 아니라 막 탄생한 올림퍼스를 포함한 전 1안 리플 메이커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이것을 되돌리는데 4년간이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현재 펜탁스가 채용하고 있는 프로그램 AE대응의 KA마운트와 AF 1안 리플용의 KAF마운트는 펜탁스 K마운트에서 시작된다. 
K마운트에서 잊어서는 안될 것이 한가지 있다. 펜탁스가 K마운트를 채택하면서 후발 메이커들에게도 K마운트 사용을 권장한 사실이다. 
이제까지 프락티카 마운트(Pentax/Practica Universal Screw Mount, M42 Screw Mount – 이를 채용한 회사는 
Practica, Fuji, Ricoh, Chinon, Cosina, Kalimar, Sears, Vivitar, Yashica and Zenit 등)의 1안 리플을 만들어온 많은 메이커, 
그리고 해외 상사 브렌드인 1안 리플의 대부분이 합세하여 K마운트를 채용했다. 
각 사의 바디와 렌즈를 상호간에 쓸 수 있다는 점으로 이전의 프락티카 마운트같은 메리트가 발생했다.

그러나, 다음 프로그램 AE시대에 개량이 이루어진 KA마운트는 타사가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Ricoh, Chinon, Cosina, Phoenix, Vivitar and Sears 등은 가능). 
이 시점부터 같은 K마운트 이면서 프로그램 AE의 작동방식이 틀린 마운트가 생겨남으로써 유저(수요자)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 어디까지나 이어지는 세계최초

올림퍼스 OM-1으로부터 4년, 캐논 AE-1부터 반년후인 1976년에 이르러 소형, 경량, 저가의 1안 리플의 발매가 실현됐다.

개량한 GPD(갈륨포토아이오드)를 최초로 채용하고, 노출표시로 메터(Exposure Meter, 노출계)를 사용하지 않고 
MX는 처음으로 3색의 LED로 정점합치(定点合致), ME는 속도 눈금을 적색 LED로 도트 표시와 함께 나타냄으로써 신선함을 주었다. 
ME에 최고속 2000분의1초 매뉴얼셔터를 첨가한 펜탁스 ME 슈퍼(ME-Super)에는 셔터 다이얼로 바뀌는 2개의 업/다운 버튼을 탑재했다. 
세계최초의 버튼 조작이었다.

ME슈퍼와, 건전지 없이도 작동하는 MX는 펜탁스SP에 이어 롱셀러기(long seller Camera)가 되었다. ME슈퍼는 AF기의 SFX가 그 뒤를 이어가게 된다. 


▣ 방수, 방진 바디 또한 세계최초

롱셀러기(long seller Camera)는 또 있다. 1980년에 발매된 펜탁스 LX가 바로 그것이다. 
펜탁스로서는 처음으로 펜타프리즘 착탈식으로 캐논 F-1이나 니콘 F/F2에 필적하는 펜탁스 사용자를 위한 대망의 최고급기(最高級機)였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펜탁스만의 개척정신을 발휘하여, 1안 리플로서는 처음으로 방수, 방진의 밀봉 구조의 바디를 완성시켰다. 

게다가, 전자제어에 의한 조리개 우선 AE와 건전지 없이도 작동 가능한 기계식 셔터를 동시에 탑재한 본격적인 프로 성향의 카메라이면서도 
당초의 이념인 소형, 경량의 정신을 관철했다.


▣ 뒤쳐진 AF화

1981년 ME슈퍼를 모체로 하는 AF 1안 리플 펜탁스ME-F가 발매되었다. 
그러나, 합점에 약간 시간이 걸리는 콘트라스트 방식이었기 때문에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펜탁스측도 오히려 타사에 지지 않으려 프로그램AE화에 힘을 쏟았다.

1983년에는 멀티모드AE의 펜탁스 슈퍼A, 다음해인 1984년에는 자매품인 프로그램A, 
1985년에는 프로그램A의 와인더 내장기 펜탁스 A3데이트를 발표했다. 
A3데이트는 펜탁스 최초의 자동감기기계였으나, 같은 해 미놀타도 역시 처음으로 자동감기기계 X-7000을 발매했다. 
미놀타 X-7000의 출현은 본격적인 AF 1안 리플 시대를 알리는 “쇼크”로서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AF 1안 리플에 뒤쳐진 펜탁스가 이를 만회하는 데는 2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쏟아 부어야 했다. 
그 동안은 프로그램AE기 펜탁스 P30이나 명기SP의 K마운트판 펜탁스 K1000등 저가의 카메라 판매에 주력할 수 밖에 없었다. 


▣ 스트로보 내장에서도 세계최초

1987년 펜탁스 SFX는 [풀타임 AF의 슈퍼포커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자신감을 가지고 등장했다. 
쿨머의 헤드라이트와 같이 내장된 스트로보가 튀어나오도록 설계된 "리트랙터블 TTL오토스트로보"와 손으로 맞추는 것보다 정확하고 
빠른(High Speed) 슈퍼포커스로 "AF보조광 내장에 의해 빛에 구애받지 않는다"라는 [최초]가 2개나 붙었다.

손앞에 기울인 대형 액정표시 오버헤드디스플레이는 사용법을 중시하는 펜탁스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였다. 
SFX는 그 다음해, SF7과 SFXN으로 진화되어간다.


▣ 끝으로

펜탁스의 "세계최초"는 양(量)과 질(質) 모두 경쟁사를 능가한다. 퀵리턴미러, TTL측광, 전자제어식무단계 변속 셔텨 등 "세계최초"의 수가 많다. 
이러한 펜탁스의 “세계최초” 기술 대부분은 경쟁사들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들이다. 
지극히 합리적이면서 필연적인 기술이었던 것이다. 

1안 리플은 온갖 촬영목적에 응할 수 있는 만능기로서, 교환렌즈 등의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거액의 개발비를 들여 제품을 개발하더라도 본전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안 리플 전문메이커로 철저히 지내온 아사히 광학이지만, 1982년 펜탁스 오토롱으로 전자동 콤팩트에 참가, 
1986년에는 펜탁스 줌70으로 현재의 줌내장 콤팩트 카메라시대를 알리는 선두주자가 되었다.

마운트 변경과 AF화에 잠시 지체되었던 펜탁스이지만 이제까지 지나온 어느 제품도 꼼꼼한 노력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때 그때에 얻을 수 있는 최신의 기술, 최신의 소재를 도입하고, 타협보다는 정도를 고집한 펜탁스의 특징은 
[바보같이 정직하단 말야!]라는 어느 개발자의 독백에 그대로 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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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펜탁스클럽 

Posted by 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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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2. 30. 20:15

콩나물콩의 종류

 

국산 콩나물 콩중 재래종은 약 20여 가지가 있으나 그중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같은 품종이라도 남쪽으로 갈수록 작아지고 북쪽으로 갈수록 굵어진다다.

1) 오리알태(유태) - 남해안을 제외한 중남부 지역에서 생산되며 오리알과 흡사한 바탕에 검은 반점이 있습니다. 지역별로 중소립, 소립등 차이가 있다.

2) 쥐눈이콩(서목태) - 쥐의 눈과 비슷하다하여 생긴이름이며 검은색으로 전국에 걸쳐 생산됩니다. 약콩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콩나물보다 식초공 한약방 등에서 약콩으로 주로 이용한다.

3) 준저리 - 진도, 해남, 완도, 제주 등 주로 남해안 일부에서 재배되며 황색바탕에 극소립으로서 수율이 높다.

 

(1)

 

1,콩나물은 물에다가 하루 불려서

2,시루나 이와 비슷한 물이 잘빠지는 그릇에다 넣어준다.

3,삼베 보자기 같은 바람이 통하는 보자기로 덮어준다.

4,물을 준다. 자주 줄수록 좋다,

5,물기가 마르면 콩나물에는 성장이 멈추고 물의 흡수가 필요해서 콩나물에 뿌리가 많이 나는데 이것을 "다방부리"라고 한다, 다방부리가 많으면 콩나물이 질기고 상품의 가치도 맛의 가치도 떨어진다,

6,콩나물에에는 햇빛이 차단 되어야 함으로 어둔 곳이나 직접 직사광선 은 피한다,햇빛을 보면 콩나물이 파랗게되고 그냥 방치하면 잎사귀가 나옵다,

7,콩나물은 따뜻한 실내온도 20도 이상이 되어야 잘자란다,

 

(2)

 

1.콩 고르기 및 닦기


수확한 콩에는 여러 가지의 불순물(不純物)로 흙, 돌, 모래, 짚 등이 혼입(混入)되어 있어서 이것을 물로 깨끗이 씻어 제거해야 한다. 콩의 수세(水洗)과정에서는 콩 표면과 표면이 마주치는 마찰작용에 의한 표피(表皮)의 일부 파괴로 수분이 잘 침투하며 팽윤이 원활하여 발아과정을 촉진시켜 주게 된다.


2.수침(水侵) : 콩 불리기


수침(水侵)은 콩 내부에 수분을 침투시켜 콩 눈의 발아를 촉진하는 과정인데 수침시간은 4~6시간, 물의 온도는 20~25℃ 정도가 적합하며 수침중 자주 저어줌으로써 공기를 흡입(吸入)시켜 주어야 발아를 촉진시킬 수 있다.
수침시간이 너무 길어지게 되면 콩 내부의 신진대사가 과다하게 진행되므로 생장력이 약해지게 됨을 주의하여야 한다. 한편 온탕침지(溫湯侵漬)방법으로서는 45~53℃에서 약 3시간 침지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는 종자소독 겸 발아촉진 효과를 얻을 수 있으나 온도를 유지시켜 주기 위하여 더운물을 공급하여 주는 단점이 있다.


3.관수(管水) : 물주기


콩나물을 재배하는데 있어서 관수과정은 생육(生育)을 위한 수분공급 뿐만 아니라 생육시 호흡작용에 의하여 발생되는 열을 냉각시켜 주는 냉각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콩나물 재배에 있어서 관수량과 시간이 부족할 경우 온도상승으로 미생물에 의한 변질 또는 생육상태의 부진을 초래하게 된다.
콩나물 재배과정중 처음 싹이 나오기 시작할 때는 호흡작용이 왕성하여 발열량이 많아 자체품온(自體品溫)이 급격하게 상승되며 싹이 2~3cm정도 생육하였을 경우에는 관수 횟수를 다른 시기보다 증가시켜야 한다. 수주시간은 5~6시간 간격으로 1일 4~5회 실시한다. 이는 생육에 적합한 온도를 유지해 주며 미생물에 의한 부패방지에도 바람직하다. 또한 수량(水量)이 부족하면 잔뿌리가 많이 생기게 되므로 충분한 양을 관수하여야 하는데 적합한 수량은 콩나물 중량에 대하여 100~150배 정도이다.


*콩나물 재배시 주의할 점*


◈ 부패예방

▷ 지하수로 재배한다.(철분 1ppm이하, 염분 100ppm 이하)
▷ 신선한 햇콩으로 재배한다. : 묵은 콩일수록 발아율이 낮다.
▷ 물주기를 적절히 한다. : 물주기는 콩나물의 성장뿐아니라 생장과정중의 분비물 및 유해가스 제거, 신선한 공기의 공급, 온도 조절을 통한 미생물 증식 저지로 부패를 예방한다.

 

◈ 잔뿌리

콩싹에서 잔뿌리가 돋는 것은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나 소비자 입장에서는 잔뿌리를 다듬어야하므로 잔뿌리가 적은 것을 선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보통 시루에서 5일부터 잔뿌리가 돋기 시작하여 수확기까지 빠른 속도로 잔뿌리가 크는데, 온도가 높고, 물주기가 부족하면 더욱 많이 돋느다. 이것의 발생을 억제하는 방안은 물을 자주 충분히 주며 아울러 온도를 낮게 하는 것이다.

 

◈ 섬유질화

콩줄기가 섬유질화하여 질기게 느껴지며, 심한 경우는 씹은후에 입안에 유질이 남는다. 섬유질화는 물주기가 부족할 때 촉진되므로 충분한 관수를 하여야 한다.

 

◈ 잔류농약

콩나물 부패를 막고, 색택을 좋게 하기 위하여 호마이등 종자소독제를 사용한다는 보도가 그동안 신문 및 TV에서 여러 차례 보도됨으로서, 많은 소비자들이 콩나물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대규모재배와 기온이 높은 여름 및 갈수기의 물의 부족 등 콩나물 부패가 쉽게 되는 조건에서 고품질의 콩나물을 생산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콩나물을 생산하는 것만이 콩나물산업을 왜 유지하고 소비자들의 신뢰를 유지하는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출처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면서..... 원문보기 글쓴이 : nostalgia
Posted by 두장
2008. 12. 23. 14:01

JOINC.co.kr

쓰레드 풀 작성

Date: 2002/12/23

Topic: 시스템 프로그램

윤상배: dreamyun@yahoo.co.kr

 

 

쓰레드 풀은 연결/종료가 자주 일어나는 웹 서버와 같은 바쁜 서버에게 있어서 효율적인 클라이언트 연결 처리를 위해서 사용하는 프로그래밍 기법이다. 이번에는 쓰레드 풀을 이용한 애플리케이션 제작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1절. Thread Pooling

 

1.1절. Thread Pooling 이란

 

pool의 사전적인 뜻을 찾아보면 연못, 저수지, 수영장 풀 등 "무엇을 담아놓는"의 뜻을 가진다. 이대로 해석하자면 Thread Pooling이란 쓰레드를 담아 놓는 용기(메모리가 될 것이다)를 뜻하며, 프로그래밍 측면에서 해석하자면, "미리 쓰레드를 할당시켜 놓는 기법"을 뜻한다.

 

그렇다면 쓰레드를 미리 할당시켜 놓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이 사이트에서 다루었던 쓰레드 프로그래밍 기법은 기본적으로 fork 방식과 매우 비슷하며, 쓰레드를 생성시켜야 될 필요가 있을 때 pthread_create(3) 등의 함수를 이용하여 새로운 작업 쓰레드를 생성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보통 쓰레드 프로그래밍은 네트웍 프로그래밍시 주로 사용됨으로 accept(2)로 연결을 기다리다가 연결이 만들어지면 accept에서 넘어온 소켓 지시자를 인자로 하는 쓰레드를 생성했다.

 

이러한 방식 - 요청이 있을 때 쓰레드를 생성시키는 - 의 쓰레드 프로그래밍 기법은 대부분의 작업을 처리하기에 충분히 효율적이며, 빠르긴하지만 클라이언트로부터의 연결과 종료가 매우 바쁘게 일어나는 서버의 경우, 계속적으로 쓰레드를 생성하고 종료해야 하는 비용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쓰레드가 비록 fork()에 비해서 생성과 소멸시에 훨씬 적은 비용을 소모한다고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으로 실상은 꽤 많은 시간과 비용을 소비하는 작업이다. 특히 Linux에서의 Pthread의 경우 clone(2)을 이용한 구현임으로 더욱더 많은 비용을 소비하게 된다.

 

Thread Pooling은 이러한 반복적인 쓰레드의 생성/소멸에 의한 비효율적인 측면을 없애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래밍 기법이다.

 

1.1.1절. Thread Pool의 구현방식

 

개념적으로 보자면 Thread Pool을 구성하는 건 매우 간단하다. 생성하고자 하는 크기만큼 ptread_create 함수를 돌리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념적인 것으로 대부분의 경우 각각의 쓰레드를 스케쥴링 해주어야 함으로, 때에 따라서는 구현을 위해서 매우 복잡한 프로그래밍 기법을 동원해야 할 때도 있다. 간단히 웹 서버를 Thread Pool로 구현한다고 가정을 해보자. - 보통 웹 서버는 HTTP의 특성상 연결/종료가 빈번하게 일어 남으로 쓰레드 풀을 사용할 경우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 만약 100개의 Thread를 미리 생성시켰고, 각각의 Thread는 하나의 클라이언트 연결을 처리한다고 가정했을 때, main 쓰레드는 accept(2)를 통해서 클라이언트를 받아들였을 때, accept()로 만들어진 소켓 지정 번호를 미리 만들어진 100개의 쓰레드 중 "놀고" 있는 쓰레드에게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main 쓰레드에서 각각의 쓰레드 상태를 유지해서 적당한 쓰레드에게 파일 지정자를 넘겨줘야 할 것이다.

 

그나마 위의 경우는 하나의 쓰레드가 하나의 연결을 처리함으로 어렵지 않게 구현하겠지만, 만약 100개의 쓰레드가 있고, 거기에 각각의 쓰레드가 10개씩의 클라이언트 연결을 처리하도록 구성한다면, 거기에다가 적당한 로드 밸런싱 기능까지 포함시키고자 한다면, 구현이 꽤 복잡해 질 수도 있다.

 

위는 Thread Pool의 대략적인 구현 상태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Thread Pool에 들어있는 각각의 쓰레드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각각의 쓰레드의 상태를 가지고 있는 Schedul 자료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MAIN THREAD에서 쓰레드 상태를 확인해서 적당한 쓰레드로 작업 분배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 실제 Linux 커널도 각각의 task의 스케쥴링을 위해서 task 구조체를 유지한다. -

 

1.1.2절. 구현 프로세스

 

이제 구현 방식에 대한 밑그림이 나왔으니, 실제로 구현을 위한 프로세스를 만들어 보도록 하자.
프로세스는 슈도 코드로 구성을 하도록 하겠다. 네트웍 서버 작성을 기준으로 하겠다.

구현은 구현하는 프로그래머가 상황에 따라서 선택하기 나름이긴 하지만 보통은 위의 방법을 기본으로 해서, 약간의 변경을 가하는 정도가 될 것이다. 위의 슈도 코드를 보면 main 쓰레드에서 accept를 받으면 휴식 상태에 있는 쓰레드를 깨운다고 되어 있는데, 이때 깨우기 위해서는 쓰레드 조건 변수를 사용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스케쥴 관련 자료 구조는 어떻게 구현하는게 쉬운 방법인지 생각해보도록 하자. 구현하는 방법은 프로그래머 맘이겠지만, 필자가 구현하고자 한다면 multimap을 이용해서 구현할 것이다. 이 자료 구조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멀티맵의 key는 쓰레드의 활성화 여부로 1 혹은 0이 된다. 그리고 value는 해당 쓰레드 정보가 될 것이다. 이렇게 멀티맵으로 만든 이유는 간단하다. 멀티맵은 정렬 연관 컨테이너임으로 key를 기준으로 자동적으로 정렬이 될 것이다. 만약 첫 번째 쓰레드가 처리 중(1)으로 변경되었다면 이 원소는 multimap의 가장 뒤로 정렬이 될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클라이언트의 수가 총 연결 가능한 클라이언트 수(Thread Pool에 생성된 쓰레드 수)를 초과하지 않는 한 phinfo.begin()로 가져온 쓰레드는 휴식 상태(0)이라는 걸 믿을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복잡해서 쓰레드 상태가 0인지 1인지 처음부터 검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사실 multimap을 쓴다면 굳이 "현재 연결된 클라이언트 수"를 유지하기 위해서 별도의 변수를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multimap에서 제공하는 count()를 이용해서 key가 "1" 인 요소의 수를 구하면 되기 때문이다. 만약 multimp의 begin() 값이 1이라면 MAX 클라이언트가 가득 찼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물론 multimap의 경우 기본적으로 key 값의 수정은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0을 1로 변경할 경우 실제로는 0을 가지는 요소를 삭제하고, 1을 가지는 새로운 요소를 삽입하는 방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클라이언트가 종료해서 1을 0으로 변경할 때에도 삭제/인서트를 해야할 것이다. Value(값)는 그대로 복사해서 삭제/인서트를 해야 한다.

 

이 방법이 번거롭다면, 그냥 배열을 쓰거나 혹은 다른 어떤 자료 구조를 쓰더라도 전혀 관계없기는 하다. 그건 자기의 기호에 맞게 선택해서 사용하면 될 문제이다.

 

1.2절. 예제

 

지금까지 Thread POOL의 구현 방법에 대해서 알아봤으니, 간단하게 구현해 보도록 하겠다. 이 코드는 지극히 기능 구현에만 신경쓴 코드이다. 에러 처리와 몇 군데 뮤텍스 잠금 처리는 각자의 재량에 맡기겠다.

 

예제 : pool_echo.cc

이 프로그램은 두 개의 인자를 받아들이며, 클라이언트의 입력을 되돌려 주는 일을 한다(echo 서버). 첫 번째 인자는 서비스 할 PORT 번호이고, 두 번째 인자는 쓰레드 생성 개수이다. 프로그램은 인자의 정보를 이용해서 PORT를 열고 클라이언트를 받아들인다. 클라이언트가 연결하면, Thread Pool에 남는 공간이 있는 지를 확인하고, 남는 공간이 있다면 클라이언트와 통신하게 된다.

 

단지 쓰레드를 미리 생성시키고 나서, 이것을 스케쥴링하기 위한 코드가 몇 줄 추가되었을 뿐 특별히 복잡한 코드는 아닐거라고 생각된다.

 

2절. 결론

 

이상 간단한 쓰레드 풀의 작성 요령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쓰레드 풀이란 개념적인 요소에 가까움으로 어떻게 구현할 지는 상황에 따라서 매우 달라지게 되며, 위의 예제는 그러한 여러 가지 상황 중 가장 기본적인 상황을 예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쨋든 위의 예제를 충분히 이해한다면 다른 상황으로의 응용 역시 별 어려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쓰레드 풀은 보통 매우 효율적인 성능을 보장해주는 애플리케이션의 작성을 위해서 사용되어짐으로, 가능한 한 빠른 쓰레드 간 전환이 가능하도록 고민해서 코딩을 해야 한다. 위의 경우 쓰레드 간 전환을 위해서 multimap을 사용하고 있는데, accept가 들어왔을 경우 해당 클라이언트에 대한 쓰레드 할당은 매우 빠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료할 경우에는 multimap의 첫 번째 원소부터 마지막 번 원소까지 search 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비효율적임으로 개선할 여지가 있다. 가장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multimap의 key 값이 1인 원소 내에서만 검색하는 것이다. 우리는 쓰레드 풀의 크기와 현재 연결된 클라이언트의 수를 알고 있음으로, multimap의 몇 번째 요소부터 key 값이 1인지를 계산해 낼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경우 약간의 시간 단축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간 단축 효과는 연결된 클라이언트의 수가 전체 POOL 사이즈에 비례해서 작을 수록 커질 것이다.

 

나머지 방법은 각자 고민을 해보기 바란다. 아마 전혀 다른 자료 구조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comes from Jo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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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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